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임스 A. 가필드 (문단 편집) === 정치인이 되기 전 === [[오하이오|오하이오 주]] 카이어호가군 모어랜드 힐스에서 출생하였다. 2세 때 부친인 에이브럼과 사별하고 어머니 일라이자 혼자 일과 가정을 담당할 수는 없어 어린 그도 노동에 나서야 했다. 10대에 가출하여 6주 정도 [[운하]]를 오르내리는 [[선원]] 일을 했는데, 물에 열 네번이나 빠진 끝에 열병에 걸려 버렸다. 병석에 있던 가필드에게 어머니가 17달러를 줘서 그 돈으로 공부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. 그 돈으로 학업에 열중하다가 그 17달러가 떨어지자 직접 [[목수]] 일을 하고 [[가정교사]] 역을 하면서 학비를 벌었다. 또한 성직자 경력도 있는데, '[[그리스도의 교회]] 제자파'의 설교자로 뛰기도 했다. 가필드의 연설 능력은 성직자 생활에서 크게 길러졌다고 한다. 그래서 훗날 대통령이 되고 나서 붙은 별명이 '설교자(Preacher) 대통령'. 어쨌든 고생하면서 공부한 끝에 윌리엄스 대학교를 졸업하고 그 대학의 학장을 지냈으며, [[변호사]], 오하이오주 [[상원의원]], [[남북전쟁]] 당시 [[미합중국 육군]] [[장교]] 등으로 근무하였다. 남북전쟁을 노예제에 맞선 성전으로 생각한 그는 오하이오의 의용군을 조직하고 샤일로 전투에서 제20여단의 여단장으로 참전했으며, 컴벌랜드군 사령관 윌리엄 로즈크랜스 휘하에서 참모장을 맡는 등 여러 임무를 수행했다. 치카모가에서 로즈크랜스가 맥없이 후퇴할 때 가필드는 아직 붕괴되지 않은 아군이 있을 것으로 예측했고 이는 정확히 맞아떨어져 가필드는 명성을 얻었다. 하지만 로즈크랜스의 후임으로는 가필드 대신 조지 H. 토머스가 선임되었고, 가필드는 소장으로 승진했지만 군대에 남는 대신 오하이오에서 [[미국 하원|연방하원의원]]으로 출마하는 것을 선택했다. 이 때의 그는 [[공화당 급진파]]에 가까운 정치적 관점을 가져 남부에 대한 징벌을 주장했다. 가필드는 링컨의 남부 유화책을 썩 좋아하지 않았고, 그의 옛 상관이었던 로즈크랜스를 링컨의 부통령 후보로 밀었지만 이루어지지는 않았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